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문학 == 당대 문해능력이 곧 권력이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무나 읽거나 쓸 수 없었다. 전체 인구의 약 '''1%''' 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1%는 대부분이 [[서기]]나 [[신관]], 아니면 귀족들 중 엘리트층이었다. 현대까지 남아 있는 기록들은 모두 이들이 남겨놓은 것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기 교육과 엘리트층과 관련된 내용들, 예를 들어 교훈과 잠언집, 그리고 도덕 지침 따위가 가장 종류가 많고 다양하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 문학을 큰 틀에서 '가르침', '이야기', '애가와 예언', '시와 노래, 찬송가', '서한', '전기 및 자서전' 이렇게 6개의 장르로 구분한다. '이야기' 장르만이 [[산문]] 형식을 사용했지만 운문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문학 구절은 2행시 형식이나 가끔은 3행시나 4행시도 썼다. 고대 이집트인 본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르는 '가르침'이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참되게 사는 법'이라는 뜻의 '세베이트'(Sebayt)라고 불렀다. 주로 교훈적인 내용이 대다수고 사회에 잘 순응해야 한다,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 식의 지극히 교과서스러운 내용이다. [[중왕국]] 시대 이래 서기들이 학교에서 달달 외울 정도로 배우던 장르였기도 하다. 애초에 교과서와 훈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도 '알다'(rḫ)와 '가르치다'(sbꜣ)이며, 일반적으로 'X를 위한 Y의 지시'라는 식의 제목이 달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프타호테프의 격언》,[* 제5왕조의 재상 프타호테프가 자신의 젊고 성급한 아들을 위해 남겨놓은 지침서다. 예를 들어 '네가 권위 있는 자라면, 청원인의 말을 들을 때 인내심을 가지라', '네가 지도자라면, 너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 책임을 져라' 같은 말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 《아메넴헤트의 가르침》,[* 살해당한 제12왕조의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가 아들 [[세누스레트 1세]]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 아메넴헤트 1세는 아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묘사한 다음, '그 누구도 믿지 말라'라는 짧고 강렬한 가르침을 안겨주고 떠난다.] 《아메네모페의 가르침》[* 서기관 아메네모페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남긴 유작. 갈수록 살기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내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설명했다. 《[[성경]]》의 <[[잠언]]>과도 내용이 비슷해서 유명한 편이다.] 등이 남아 있다. 이중에서 《프타호테프의 격언》과 《[[아메넴헤트 1세]]의 가르침》은 전형적인 중왕국 시대의 작품이지만 《아메네모페의 가르침》은 전형적인 신왕국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20px-PapyrusWestcar_photomerge-AltesMuseum-Berlin-5.jpg|width=100%]]}}} || || '''《케옵스 왕의 궁정》이야기가 담긴 '웨스트카 파피루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20명의 궁녀들에게 [[망사]] 옷을 입히고 노를 젓게 한 [[쿠푸]] 왕의 이야기다. 노를 젓던 도중 한 궁녀가 [[공작석]]으로 만든 물고기 브로치를 물 속에 떨어뜨렸다. 궁녀는 브로치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 노를 저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파라오가 수석 마법사에게 시켜 호수를 반으로 접어 호숫바닥의 브로치를 찾아내어 돌려준다는 이야기다. 이집트의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들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 '이야기' 장르는 고대 이집트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희소하고 남은 것도 거의 없는 장르다. 이쪽은 교훈을 담는다기보다는 재미나 탐험기를 기록해놓은 것인데, 가장 유명한 건 《[[세티 2세#s-2.1|두 형제의 이야기]]》, 《케옵스 왕의 궁정》[* [[쿠푸]] 왕의 시대에 마법사들이 부린 기적에 대한 이야기. 예를 들어 밀랍으로 악어를 만들어 마을 사람을 삼키게 한다거나 부적으로 호수를 접어서 떨어뜨린 시녀의 브로치를 찾는다거나 하는 이야기다.], 《네페르카레와 사세네트 장군》,[* 이 이야기는 [[동성애]]스러운 느낌이 나서 여기에 등장하는 파라오 [[페피 2세]]가 동성애를 즐기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유창한 농부의 이야기》,[* 가난한 농부가 고위 관리의 재산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결국 정의가 구현되고 농부를 협박하던 고위 관리가 재산을 탈탈 털리면서 끝난다.] 따위가 있다. 주로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장르지만 역사적 가치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시누헤의 이야기》[* 세누헤는 세누스레트 왕자를 [[리비아]]까지 동행하는 관리였다. 도중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가 붕어하자 겁에 질린 세누헤는 저 멀리 가나안으로 도망쳤고, 그곳의 사나운 부족들을 정벌한 뒤 부족장 지위에까지 올랐다. 모든 적들을 평정한 시누헤는 말년에 이집트로 귀환하기를 희망했다. 이를 전해들은 [[세누스레트 1세]]가 그의 귀향을 허락하면서 결국 시누헤는 고향에서 편안히 눈을 감는다는 [[해피엔딩]] 스토리이다.]에서는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의 죽음에 관해 설명하고, 《웨나문의 보고서》[* 카르나크 대신전의 사제였던 웨나문은 이집트 최전성기의 끝자락인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이었다. 그는 아문 대사제의 명을 받들어 삼나무를 사기 위해 페니키아의 [[비블로스]] 지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환대는커녕 적대받자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비블로스에서 1년을 머무르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는 도중 길을 헤맸는데... 여기서 이야기가 끊긴다. 당시 이집트의 쇠락하는 국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에는 [[람세스 11세]] 시절 [[삼나무]]를 사기 위해 저멀리 [[페니키아]]까지 여행한 이집트인들의 경험이 생생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 장르의 초기적인 형태라는 점에서 문학적인 가치도 높다. '애가와 예언'은 [[중왕국]] 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창작된 장르였다. 말은 거창한 '예언'이라고 써놨지만 사실상 왕조의 정당성을 찬양하는 장르였다. 한국의 《[[용비어천가]]》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르가 가장 많이 쓰인 시대는 [[아메넴헤트 1세]]의 재위기인데, 그가 전대 파라오인 멘투호테프 4세를 강제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메넴헤트 1세가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장려했다고 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네페르티의 예언》이다. 고왕국 시절인 제4왕조의 신관 네페르티의 예언이라는데, 그 내용은 고왕국이 멸망하고 [[이집트 제1중간기|혼란기]]가 닥쳐올 것이며, 그 후에 '아메니'라는 이름의 영웅이 나타나 이집트에 평화를 되찾아올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아메니'라는 이름에서 감이 오겠지만 아메넴헤트 1세를 찬양하기 위해서 후대에 창작한 허구에 불과하다. 이후 예언 장르는 신왕국 시대에는 별 인기가 없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제국]] 시대 들어서 다시 인기를 얻는다. 예언 장르와 위의 '가르침' 장르를 섞어놓은 것도 있는데 대표작이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이다. '시와 노래, 찬송가' 장르는 고왕국 시대 이래 활발하게 창작된 분야였다. 주요 목적은 파라오와 신을 찬양하거나 망자가 무덤에서 사후세계로 평안히 가도록 도와주는 것.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락들은 거의 없지만, 그나마 [[멤피스]]의 파라오를 찬미하는 세누스레트 3세의 찬양가, 저녁 만찬에 손님을 맞을 때 사용되던 <하프 연주가의 노래> 등이 있다. 가장 유명한 건 [[아마르나]]의 [[아톤]] 신전에서 발견된 [[아케나톤]]의 <아톤의 대찬양가>이다. 《성경》 <[[시편]]> 104의 원형이 이 <아톤의 대찬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랑과 관련된 [[발라드]] 노래가 분명 존재하긴 했지만 [[신왕국]] 이전의 사랑 노래들은 남아 있는 게 없다. 이 이집트의 사랑 노래는 연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방식 등을 포함해서 훗날 《[[성경]]》의 <[[애가]]>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한'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서로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썼던 [[편지]]이다. 보통 장거리로 보낼 때는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밀랍]]으로 봉인했고, 굳이 숨겨야 할 내용이 아닐 때는 도기 조각이나 사금파리에 글을 써서 보냈다. 왕족이나 외교 공문의 경우 암석에다가 문자를 새기는 일도 많았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 편지는 제5왕조 시절까지 연혁이 거슬러올라가며, 이후 제6왕조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편지 서한 양식들이 발전했다. 서기들은 편지에만 쓰는 특수한 문체와 인사에 사용하기 좋은 미사여구들을 따로 배웠을 정도였다. 제19왕조에 쓰인 '아나스타스 파피루스'에는 당시 서기 지망생들이 베껴 썼던 수많은 문서들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현생과 후생에 대한 적절한 인사말, 수사학, 격언의 해석 등 편지를 쓰고 읽을 때 필수적인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 이 파피루스에 보면 심지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요즘 학생들]]은 [[서아시아]]의 지역 지명만 달달 외우지 그 자세한 내용과 세부 요소는 외우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꼬는 내용도 있다. '전기 및 자서전'은 인물의 생전 업적을 줄줄이 나열해놓은 목록이었다. 자서전의 주인공이 스스로 구술하거나 집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개념의 제대로 된 [[자서전]]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사망 이후 타인이 주인공의 일생을 대필하는 전기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위대한 [[파라오]]의 업적을 남긴 전기를 가장 많이 남겼지만, 파라오뿐만 아니라 일반 정부 관리들도 자신의 전기를 써서 남겼다. 제6왕조 시절부터 일반인들의 일생을 담은 전기들이 등장했고 [[중왕국]] 시절에는 관리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내용이 확장된다. [[신왕국]] 시대에는 서기와 귀족들의 전기만 쓰이던 데에서 더 나아가 군 장교와 군인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물론 모든 전기들은 생전 고인의 성공적인 삶을 축하하는 고리타분한 내용이다. 문학의 장르에 포함된다고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법령과 연대기, 왕의 목록'도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사원과 유적 벽과 기둥에 그득그득 그려진 것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간다. 고고학자들이 고대사를 재구성할 때 가장 참고를 많이 하는 분야로 [[투트모세 3세]]나 [[람세스 2세]]의 업적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세세하게 기록해놨다. 수백 명에 달하는 파라오들의 목록을 알 수 있는 것도 이 '법령과 연대기, 왕의 목록' 장르 덕분에 가능했다. 제5왕조의 팔레르모 석, 그리고 이 분야의 끝판왕이나 다름없는 [[마네토]]의 《왕명표》도 여기에 속한다. 마네토는 기원전 3세기의 역사가로 우리가 아는 왕조의 구분을 처음으로 분류한 사람이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최초로 포괄적으로 편찬한 인물'''이라는 엄청난 타이틀도 있는데, 모든 파라오들의 목록을 빠짐없이 다 적어놔서[* [[아케나톤]], [[투탕카멘]], [[아이(파라오)|아이]]처럼 [[기록말살형]]을 당해버린 파라오들의 이름은 없다. 마네토도 직접 보고 적은 게 아니라 이전 기록들을 참고해서 적었기 때문이다.] 현대 이집트학의 대부분은 이 마네토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잦다. 고대 이집트 기록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엄숙하고 진지한 기록들만 생각하지만 이집트인도 사람이었던지라 [[낙서]]를 즐겼다. 신왕국 시대에 옛 유적지들을 탐방하던 사람들이 사원과 피라미드 구석에 대놓고 낙서를 하는가 하면, 자신이 남긴 낙서가 지워지지 않도록 일부러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다 낙서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일부 서기들은 기도문이나 찬양가를 써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낙서들은 자신이 왔었다는 걸 알리거나 [[음담패설]] 등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건축물의 주인공을 비난하거나, 경쟁적으로 서로의 글씨체가 엉망이라고 욕하거나, [[패드립|해당 서기의 조상을 모욕하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내용의 낙서들도 많이 남아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에는 대놓고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를 그린 고대 이집트인의 낙서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